Camino de Madrid|| Ep.8 여유 잃은 길.

Camino de Madrid

Episode 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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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에 잠들었던 걸까? 창 밖의 어둠이 방안의 것과 경계선을 잃었던 저녁. 달달하던 로제 와인의 꾀임에 꿈나라로 정신을 빼았겼다.

 

꿈속까지 아침을 알리러 온 새의 지저귐에 눈을떴다. '몇시지?' 커튼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땀이 베어 조금 눅눅해진 이불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아 코에 박고선 눈에 초점을 맞추려고 미간을 접어본다. 맙소사. 화면에 비춰진 내 모습에, 그리고 화면에 비춰진 숫자에 두번 놀라 이불킥을 날렸다. 9시다. 벌떡 일어나 방안을 미친듯 헤집었다.

선풍기 위에 널어 두었던 팬티 두장을 챙기다 말고 메마른 입에 치약을 대충 짜 넣고 칫솔을 한 손에 쥐어 양치질을 하다말고, 다른 손에 소중이를 꺼내집고선 밤새 축적해 둔 소변을 비워냈다. 허벅지가 부르르 떨려온다. 남자만이 알 수 있는 아침의 쾌락이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 시간이 없어 식빵 따로, 햄 따로, 치즈 따로 볼이 터져라 입에 욱여 넣었다. 배낭에도 짐을 순서없이 마구 집어 넣다가 어제 구글지도에서 찾아보았던 오늘의 루트가 떠올랐다. 만만한 일정이 아니다. 귀찮지만 침대에 배낭을 뒤엎고 무게 배분을 생각하며 가방을 다시 꾸렸다.

급하게 방을 나서려다 혹시나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한 "짐"이 있을까 싶어 배낭을 멘 채 뒤뚱거리며 방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다. 어짜피 챙기면 짐 될 것들인데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또 마음이 편치 않다. 부산한 와중에 꼼꼼했는지 다행이 잊어 버린건 없다. 안도의 한숨이 섞인 심호흡을 내쉬고선 방을 나선다.

손목에 걸 시간이 없어 손에 쥐고있던 시계를 이제서야 확인해 본다. 9시 15분. 번개 같았다. 대학생때 맨날 늦잠을 자서 허겁지겁 준비하던 습관이 카미노에서 빛을 발하는구나..

다행인건지 아침 9시에 연다는 인포센터. 그냥 지나치려다 오늘의 루트도 알아볼겸 잠시 들리기로 한다. 아침 인사와 함께 다짜고짜 도장을 구걸하는 내게 친절한 여직원. 세고비아로 가는 카미노 길을 문의하니 여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입체 지도를 꺼내온다. 지도에서 제일 붉은 곳에 손가락을 가리키더니 "여기" 란다.



"No...."

"Si!"

"No...."

내가 뜻하고자 하는 "No"는 의구심의 "아닐텐데"가 아닌 부정의 "안돼!!" 였다.



오늘 넘어야 할 산의 이름은 과다라마(Guadarram). 녀석의 시뻘건 입 속으로 뛰어들어야 세고비아로 향할 수 있다. '멍청한 녀석!'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든 내 자신을 핍박해 보지만 좋은 술 마시고 숙취없이 깨어났으니 그나마 감사하다. 아침에 빵조가리 하나 주워먹는 스페인에서 해장이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를 쥐어주며 열심히 걸으면 저녁 6시 전에는 세고비야에 도착하지 않겠냐며 응원해주는 여직원.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선 작별인사를 나눴다.

광장에서 노란 화살표를 따라 언덕길로 접어든다. 등산복장인 여행객들이 모두 밝은 표정을 입에 걸고 산 입구를 향해 꼬리를 문 행군을 하고있다. 그 대열에 끼지 못하고 바쁜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친다. 무리한다며 조심 하라는 노인네들의 경고에도 고개만 끄덕인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주차장을 지나 안내소인 작은 통나무집 앞에 잠시 멈춰섰다. 제복까지 갖춰입은 레인져 아주머니께 가장 쉬운 루트를 물어보니 나무에 붙어있는 초록색 스티커만 따라가면 된단다. 카미노 루트를 물어보니 로마인들이 개척했다는 칼자다 데 로마나(Calzada de Romana)길인 8km 코스가 있단다. 난이도 별로 구분된 길들이 모두 푸에르토 데 라 푸엔프리아(Puerto de la Fuenfria)라는 정상에서 만난다고 한다. 웃고 떠들며 여유로운 산행을 즐기는 여행객들과 달리 카미노를 걷는 난 지킬 수 있는건 지키자며 카미노 루트를 선택했다. 허벅지만 믿고 로마인이 되어보기로...



등산객들과 같은 길을 걷지만 유난히 외롭다. 안내소 근처에 있던 피크닉 장소에서 눈을 마주쳤던 어느 스페인 가족은 수박좀 먹고 가라며 수박을 들어보이며 손짓으로 불렀지만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외친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의를 정중하지도 못한 사과로 거부한채 그들의 여유를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게 너무나 아쉽다. 여유라는게 마음속에 방 한칸만 마련해 두면 되는건데... 혼자가 되면 오히려 더 여유롭지 못한거 같다. 어쩌면 사회에서의 내 모습을 버리지 못한거 같다. 여유라는게 나태함으로 비춰질까봐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단절시키다보니 외톨이가 되었었다. 혹 프랑스 루트에서 윗니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조언했던 내 모습도 다 모순된게 아니였는지... 혼자일때 여유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순례자가 아닐까.



지금 내 발걸음은 제구력 잃은 열정인지 잠깐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킬레스건이 찢어질듯 아프지만 허벅지 상태가 쓸데없이 좋아 멈추지 않았다 (못했다..).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 바다같은 하늘만 올려다본채 계속해서 전진.  




로마인들이 그리 정성들여 만든길은 아닌지 길 상태가 많이 낙후되어 운치란것도 없고, 무엇보다 다른 등산객들은 조금 더 쉬운 루트를 선택했는지 언제부턴가 혼자 걷게 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보니 등산로까지 점령한 자스민 수풀. 결국 싸대기를 맞으며 전진했다. 카미노를 걸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스민 향이 워낙 좋아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정상에 근접하자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던 나무들이 자취를 감추고 바다같은 하늘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산 정산인 줄 알았던 푸에르토 데 라 푸엔프리아는 알고보니 두개의 산 봉우리 사이에 놓여진 산마루였다. 어찌됬건 오름막의 끝지점에 도달하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몰아친다.



워낙에 많은 루트가 만나는 지점이다보니 사람이 많다. 그 중 헤어라인이 이마와의 싸움에서 진듯한 대머리 스페인 녀석과 함께 무용담을 늘어놓아 본다. 입구에서 한시간 반만에 왔다는 녀석은 세르세디야에서 15kg나 되는 배낭을 메고 세시간만에 왔다는 내 자랑에 꼬리를 내렸다. 쓸데없는 부심에서 승리를 거둔 난 잠시나마 행복에 젖었다. 인류는 이런 쓸데없는 경쟁구도에 의해 발전한게 분명하다. 미국을 건국한 카네기와 록커펠러도 누가봐도 유치한 경쟁심에 의해 미국을 강국으로 일으켜 세웠다. 마르크스 형님의 사상은 역시나 현실성없는 이데올로기에 그친다. 자본주의 만세! (조크다).



지도가 보여 남은 일정을 확인해 본다. 일정이 아직 반도 넘게 남았을 뿐더러 무릎살인마인 내리막길과 오늘 같은 날씨에 그늘 한점없는 평야를 건너야만 세고비야에 도착할 수 있다.



어제 저녁에 미리 싸 두었던 샌드위치를 꺼내 먹기로 한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출발했기에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너무나 질려버린 샌드위치.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한다.



'맛없는 샌드위치 너나 먹어!'

꼬르륵

'아니야... 내가 먹을게...'



한국 같았으면 노점상이 분명 있을법한 위치인데... 막걸리 한잔에 파전이 고프다. 그래도 배가 고팠는지 눅눅한 샌드위치가 썩 나쁘지 않다. 



관광지라 그런지 세고비아로 향하는 길이 잘 표식되어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리막길.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잡품점 주인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워킹스틱과 빗자루 손잡이의 인생을 마감하고 내 세번째 발로 환생한 마틸다를 손에 꽉 부여잡고 조심스레 하산을 시작했다.

이곳도 칼자다 로마나인지 모르겠지만 집채만한 바위들로 형성된 하산길을 따라 산 능선을 가로질렀다. 다시금 나타난 나무 그늘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발걸음을 바삐했다. 빨리 걷다보니 갈증이 쉴 새 없이 찾아온다. 물을 넉넉히 챙겼지만 평야를 만나기 전에 벌써 반이나 비웠다. 대낮의 더위를 남아있는 물 1리터로 맞서싸울 자신이 없는데... 만자나레스를 향하던 날의 불지옥이 반복되는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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