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no de Madrid|| Ep.9 걸어서 1000km. 그 끝. 세고비아로 향한 카미노 길.



급작스런 내리막길이 나타나 스틱에 체중을 최대한 실은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다. 자칫 배낭의 무게가 무릎에 실리게 되면 오늘 남은 일정은 생지옥이 되어 버리기 때문. 이미 내 것이 아닌 발 걸음이 중력에 의해 힘겹게 앞서간다. 그리고 그 발 걸음에 업히듯 실려있는 내 몸뚱아리는 멘탈과의 바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 정말 마지막이 되어버릴 수 있는 이 카미노 길을 걸으며, 단지 '잘 걸어야겠다'는 목표만 둘 순 없다. 무언가 의미있는 길이 되었으면 하는 압박감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세고비야를 향해 걸어야 할 지 머리속으로 장황한 토론을 열어본다. 프랑스길이 "우리"에게 소중했다, 반면에 마드리드길은 나만의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즐기지 못했다면 분명 후회가 남을거란걸 알기에. 프랑스 길에서 배웠던 교훈을 되새겨 본다. 고통속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을거란거. 오늘 하루만은 감정과 감성에 충실하며 아플땐 더 열심히 아프고, 힘들땐 더 힘들기로.

하산 할수록 숲이 우거지고 은은한 솔 향이 코를 자극한다. 내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소리. 고요한 산 길을 가로지르는 내 무거운 발걸음. 나무에 튕기며 주인없는 저음의 울림으로 변이되어 숲을 가득 메운다. 나의 것이 되지 못한 공간에서 난 두려움에 휩싸인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숲을 끝으로 절경의 문이 열렸다. 수채화로 그려넣은듯한 하늘과 지평선까지 펼쳐진 드넓은 불지옥. 넘나 아름답다. 완만한 경사면을 내려오는데도 무릎에 무리가 갔는지 관절 부분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몰려와서 인지 '잠시 쉬었다 갈까'하는 생각이 손에 쥐어든 스틱에 의해 단번에 제압되어 버린다. 오른만큼 내려가야하는 자연의 섭리를 원망하며 발걸음을 계속한다.




시야가 확보되자 흐릿하던 마을의 윤곽이 제 모습을 갖춘다. 신과 함께하려는 신자들의 염원이 세워올린 거대한 성당과, 로마인들의 지혜와 의지가 담겨있는 아쿠아덕트(수로)가 눈의 띈다. 성당의 규모를 보아하니 저곳이 세고비야임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세고비아 전에 작은 마을이라도 지나쳤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내가 대학교 1학년때 백지장으로 제출했던 생물 기말고사 시험지처럼 허허벌판만이 나를 시험하듯 펼쳐져있다. 오늘도 장기전이 될 것 같다. 물없이 얼마나 고통받으며 인내의 시간을 보낼까. 


 



완만한 경사면에 탁트인 시야. 목표가 눈 앞에 있지만 가까워 지지 않음에 당근을 향해 질주하는 당나귀가 된 기분이다. 다른점이 있다면, 난 시원한 코카콜라를 갈망하고 있다. 100미터앞에 콜라 한잔이 놓여있다면 채찍질 없이도 전속질주가 가능할텐데...




이상하리만큼 평평한 지역이 나와 조금 여유롭게 걷다 길도 아닌 벌판 중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카미노 비석을 발견했다.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의아해 하다가. 포토존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한장 찍어본다.

확실하다. 포토존이다.





지평선에 걸쳐있던 세고비야를 향해 걷는 나.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 지지 않는다.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달아나는 지평선이 얄밉다.



 버려진 가축 농장을 가로질러 걸으니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무릎 파괴자를 졸업으로 풀이가 없는듯한 수학문제처럼 지평선을 향해 곧게 뻗어있는 흙길이 앞에 놓였다. 바람 한 점 없고 그늘한 줌 없는 지옥길을 자신없는 발걸음으로 시작해 본다. 

한참을 걷는데, 확률적으로 구름에 가려져야 할 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쉼없이 작렬하다. 수학시간에 배웠던 표준편차는 이번 풀이에는 적합하지 않나보다. 혼자 징징거리다가 받아 줄 사람이 필요해 고프로를 틀고 하소연을 해 본다.




마을이 나타나 기대를 가져보지만 당췌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덥다보니 불평이 속사포 랩처럼 나온다. 짜증석인 말투로 내뱉는 말들이 누구 들으라고 이렇게 막힘없이 흘러 나오는지... 받아주는 고프로도 실증나서 달아날 정도다.



언젠가 마드리드 길도 개선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불평의 씨앗을 바닥에 흩뿌리며 걸음을 계속했다. (물론 포기해봤자 목적지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도시임을 증명하는 차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곳이 세고비아임을 증명하는 도시 진입로 교통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여느 도시든, 변두리에 주유소가 있는법! 마른땅에 오아시스같은 휴게소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음료수는 죄다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어서오세요가 아닌 "괜찮아요" 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직원 아저씨께 "곧 괜찮아 질거라고" 말한뒤 주유소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화장실 앞인것도 모르고 반나절동안 간절했던 그늘과, 어쩌면 날 이곳까지 오게 한 동력이 되어 준 코카콜라가 좋다며 그 모습을 영상에 담아본다.  



내 모습이 측은했는지, 관광버스를 주유하고 있던 운전기사님은 날 곁눈질로 눈여겨 보다가 휘파람으로 내 관심을 끈 뒤에 자신이 아이스박스에 담아 다니던 콜라를 꺼내 들고선 내게 권했다. 이미 갈증은 해소됬다며 사양해보지만 막무가내셔서 고맙다는 말과함께 넙죽 받아들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오는 아저씨. 카미노 길을 걷고 있다고 설명하니 종교적인 이유로 걷는건진 궁금해 하신다. 뙤양볕에서 정신이 나른해졌을 즈음 신을 본거 같다고 하니 자신도 장시간동안 운전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해봤다며 미소 짓는다. 아재와 아재개그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가야겠다고 배낭을 짊머진 내게 비장한 말을 해주셨다,

"신은 간절할 때만 찾는 존재가 아니다" 라고.

글쎄.. 내가 간절할때 찾은건 신이 아니라 코카콜라였으니 나에게 신은 여느 마트에서나 찾을 수 있는 쉬운 존재였구나.

 



결국 음료수를 다 마시지 못하고 세고비아의 중심부를 향해 걷는다. 나의 방문을 알리는 힘들어간 스틱질로 사람들의 시선을 강탈했다. 지금 내 모습은 꾀죄죄하지만 카미노를 혼자 걸으며 갈망했던 관심이 내게 집중되니 기분이 좋다. 나의 존재를, 그리고 나의 목적을 알아주는 이는 하나 없지만 자축하는 마음으로 걸으니 산티아고에 도착했을때 처럼 마음이 요동친다. 지금 성당까지 찾아가는건 무리라 생각되어, 마을 중심부에있는 인포센터 앞이 내가 걷는 마드리드 길의 끝지점이라 내멋대로 정해본다.




사전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호스텔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체크인을 마치고 엘레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많이 야위었다. 줄어든 내 육체적인 무게를 대신해 카미노 길 위에서 난 앞으로 내가 삶을 헤쳐나갈 용기와, 지혜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의 무게를 얻었다.

카미노 데 마드리드, 마드리드 길을 걸으며 처음에 내가 세웠던 목적이상을 달성한 것 같다. 카미노가 던진 수많은 허들을 넘으며 나약하게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세삼스레 느꼈다. 무엇보다 카미노는 내게 정말 소중한 교훈을 호되게 가르켜 주었다. 헛되지 않은 고통속에는 행복도 공존한다고. 다만 즐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난 카미노를 "좋은 길"로 기억하기 보다 "즐거운 길"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값진 교훈을 받은 난 카미노에 도전하는 모든 이에게 말하고 싶다.

Que la pases bien en Camino.

즐거운 길 되세요.    


카미노 길 보다 길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 연재가 드디어 끝이 났네요. 카미노 길의 추억들이 너무나 강렬하기에 일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어난 일 같이 기억에 생생하네요. 다만, 제 글 솜씨와 제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허접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타 나라의 여행을 기록한 여행기도 카미노 글 처럼 애착감 갖고 올릴테니 자주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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